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홀랜드 스미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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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홀랜드 스미스(Holland Smith)는 "하울린 매드(Howlin' Mad)"라는 별명으로 알려진 미국의 해병대 장군으로, 제2차 세계 대전 중 태평양 전선에서 상륙 작전을 지휘했다. 그는 1905년 해병 소위로 임관하여 제1차 세계 대전에 참전했으며, 제2차 세계 대전 중에는 제1해병 사단을 이끌고 수륙 양용 훈련을 통해 미군 상륙 작전 성공에 기여했다. 이후 길버트 제도 및 마셜 제도 전역, 사이판 전투, 이오지마 전투 등을 지휘했으나, 이오지마 전투의 피해가 컸던 탓에 책임을 지고 사실상 해임되었다. 1946년 퇴역 후 자서전을 출간했으며, 1967년 84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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홀랜드 스미스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홀랜드 M. 스미스 장군
별칭'"하울링 매드"(Howlin' Mad)'
별칭 설명'현대 상륙전의 아버지'
출생명홀랜드 맥테이어 스미스
출생일1882년 4월 20일
사망일1967년 1월 12일
출생지미국 앨라배마주
사망지미국 캘리포니아주 샌디에이고
안장지포트 로즈크랜스 국립묘지
군대미국 해병대
복무 기간1905년–1946년
최종 계급대장
지휘
주요 지휘 경력해병대 부사령관
제1해병여단
제1해병사단
제5상륙군단
참전
주요 참전 전투미–필리핀 전쟁
전후 반란
바나나 전쟁
도미니카 공화국 개입
제1차 세계 대전
벨로 전투
백일 전투
뫼즈-아르곤 공세
제2차 세계 대전
길버트 제도와 마셜 제도 전역
타라와 전투
콰잘레인 전투
마리아나 제도 및 팔라우 제도 전역
사이판 전투
화산 열도 및 류큐 열도 전역
이오지마 전투
서훈
훈장해군 공로 훈장 (4회)
퍼플 하트 훈장
크루아 드 게르

2. 생애

스미스는 1882년 4월 20일 미국 앨라배마주 러셀 군에서 존 웨슬리 스미스와 코넬리아 캐롤라인 맥타일러 스미스 사이에서 태어났다. 1901년에 Alabama Polytechnic Institute(현 오번 대학교)에서 이학 학사 학위를 취득했다. 스미스는 이미 군인이 되려는 뜻을 굳혔고, 앨라배마 주 방위군의 기병대에 입대하여 상사(First Sergeant)가 되었다. 한편, 스미스는 1903년앨라배마 대학교에서 법학 학사 학위를 취득하고, 몽고메리 군에서 1년간 법률을 공부했다. 스미스는 육군 장교 임관을 희망했지만, 육군에 결원이 없었기 때문에, 1905년 3월 20일에 해병 소위로 임관하여 해병대 장교가 되었다.

1906년 4월 애나폴리스에서의 교육 과정을 수료했다. 제1차 세계 대전에서는 부하들로부터 "하울린 매드(Howlin' Mad)"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로 용감하게 싸웠다. 이 대전 중에는 미국 육군 지휘참모대학이 휴교 중(1916-20년)이었기 때문에, 프랑스의 랑그르(Langres)에 설치된 육군 참모대학(Army General Staff College, AGSC)(1917.11~1918.12)에 해병대에서 입학한 최초 6명의 장교 중 한 명으로 입학했다. 1918년 2월에 졸업하여 상급 지휘관의 길을 걷게 되었다.

1939년에는 준장으로 진급하여 제1해병 여단장이 되었다. 1941년 2월에는 제1해병 사단의 초대 사단장이 되었고, 6월에는 대서양 함대 소속의 제1군 사령관이 되었다. 지휘하에는 제1해병 사단과 육군 제1·제3 보병 사단이 존재했다. 제2차 세계 대전 전야에 스미스는 해군·육군 그리고 해병대 부대에 수륙 양용전 훈련을 실시했다. 이는 태평양·대서양의 전투에서 미군의 상륙 작전 성공에 큰 요인이 되었다.

태평양 전쟁이 발발하자 1942년 5월에 알렉산더 반데그리프트 소장 지휘의 제1해병 사단이 스미스의 지휘에서 벗어나 태평양 방면의 격전지 과달카날섬에 투입되었다. 이어서 8월에는 스미스 자신도 태평양 전선으로 이동하여 태평양 함대 소속의 상륙 사령관이 되었다. 스미스는 태평양 전선으로 이동한 후, 아투섬 공략 작전에 참관 무관으로 참가, 길버트 제도 및 마셜 제도 전역·사이판 전투의 상륙군을 지휘하는 등 일선에서 싸웠다. 또한 이 사이판 전투 때, 진군이 늦는 것은 지휘에 문제가 있다는 이유로 육군의 제27 보병 사단/27th Infantry Division (United States)영어장 랄프 C. 스미스/Ralph C. Smith영어 소장을 해임하는 「스미스 대 스미스 사건」이 발생했다.

이후, 이오지마 전투에서 제56 임무 부대 사령관으로서, 제5 양용전 군단 (제3해병사단, 제4해병사단, 제5해병사단으로 구성)을 지휘했다. 이 이오지마 전투는 태평양 전쟁 중, 미국군의 손해가 일본군의 손해를 웃돈 드문 사례로, 전사·부상자는 합쳐서 3만 명에 가까웠다. 그 때문에 책임을 지고 사실상 해임되었다. 레이먼드 스프루언스와 리치먼드 K. 터너는 그가 오키나와 전투의 지휘를 맡기를 원했지만, 앞서 언급한 스미스 대 스미스 사건으로 상관인 태평양 방면 최고 사령관 체스터 니미츠를 비롯한 상층부의 심기를 거슬렀기 때문에 기각되어 그가 오키나와에서 싸우는 일은 없었다. 결국, 오키나와 전투의 사령관에는 육군의 사이먼 B. 버크너 주니어 중장이 임명되었다. 1945년 9월 2일의 전함 「미주리」에서의 일본 항복 조인식에서, 막료로부터 스미스를 참석시키는 것이 어떻겠냐는 제안이 있었을 때도 니미츠는 거부했다고 한다.

1946년 5월에 퇴역하여 퇴역 군인 명단에서 명예 대장 계급을 받았다. 퇴역 후에는 캘리포니아주 라호야에 거주하며 취미인 원예에 몰두했다. 1948년에 자서전을 집필하여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1967년 1월 12일 캘리포니아주 샌디에이고의 해군 병원에서 사망했으며, 향년 84세였다. 장례식은 14일 해병대 신병 훈련소 교회에서 거행되었으며, 포트 로즈크란스 국립 묘지/Fort Rosecrans National Cemetery영어에 매장되었다. 스미스 가문은 홀랜드의 아내 에이다 B. 윌킨슨은 1962년에 사망했지만, 아들 존 V. 스미스 소장이 가문을 이었다.

2. 1. 초기 생애 및 경력

홀랜드 스미스는 1882년 4월 20일 앨라배마주 해치추비에서 존 V. 스미스와 코넬리아 캐롤라인 맥타이어 사이에서 태어났다.[2] 그는 독실한 감리교 집안 출신이었다.[2] 1901년 오번 대학교(당시 앨라배마 폴리테크닉 연구소)에서 이학사 학위를 받았다.[2] 그는 이미 군인의 길을 걷기로 결심하고 앨라배마 주 방위군 기병대에서 수석 상사로 복무하였다.[2] 1903년 앨라배마 대학교에서 법학사 학위를 취득한 후,[2] 몽고메리에서 1년 동안 변호사로 활동했다.[2]

1905년, 스미스는 육군에 자리가 없어 해병대 소위로 임관하였다.[2] 1906년 4월 메릴랜드주 아나폴리스의 응용학교를 졸업한 후,[2] 필리핀으로 건너가 1908년 9월까지 제1 임시 해병 여단에서 복무했다.[2] 이후 미국으로 돌아와 1909년 12월까지 아나폴리스 해병 막사에 주둔하다가 파나마로 원정 임무를 떠났다.[2] 1910년 4월 파나마에서 귀환 후, 아나폴리스, 워싱턴주 퓨젯 사운드, 캘리포니아주 샌디에이고, 워싱턴주 시애틀의 징병소를 거쳐 1912년 9월 필리핀에서 제1 해병 여단에 다시 합류했다.[2]

1914년 4월까지 제1 여단에 머물면서 에 탑승하여 해병대 파견대를 지휘했고, 1915년 7월까지 아시아 해역에서 임무를 수행했다.[2] 미국으로 돌아온 그는 루이지애나주 뉴올리언스 해군 기지에서 근무하다가 1916년 6월 도미니카 공화국으로 파견되어 제4 해병 연대의 일원으로 현지 반군 진압 작전에 참여했다.[2] 그는 산티아고 행진과 라 페나 및 킬로미터 29에서의 교전에 참여했다.[2] 1917년 5월 미국으로 돌아온 그는 2주 후 프랑스로 건너가 제1차 세계 대전에 참전했다.[2]

2. 2. 제1차 세계 대전

홀랜드 스미스는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프랑스에 파병되어 제5 해병대 제8 기관총 중대를 지휘했다.[3] 그는 프랑스 샤쇠르 알팽에서 숙련된 프랑스 군인들로부터 전쟁 전술을 배웠다.[3] 이후 랑그르에 있는 미국 원정군(AEF) 육군 참모대학을 1918년 2월에 졸업한 후, 제2보병사단 소속 4차 해병 원정 여단의 부관으로 임명되었다.[3] 벨로 우드 전투에서 여단 연락 장교로서 여단 내의 내부 통신을 감독하는 역할을 맡았다.[3]

준장 찰스 A. 도옌(왼쪽, 제4해병여단장)과 그의 여단 참모진, 1918년 2월 프랑스 당블랭. 도옌의 오른쪽에 있는 사람은 여단 부관인 메이저 홀랜드 스미스이다.


준장 제임스 하보드, 제4해병여단장인 도옌의 후임자, 그리고 스미스를 포함한 그의 여단 참모들, 1918년 5월


1918년 7월, 제1군단으로 전출되어 아인-마른 공세, 오아즈-아인 공세, 생 미히엘 전투, 뫼즈-아르곤 공세 동안 연락 담당 작전 보좌관으로 복무했다.[3] 1918년 11월 11일 휴전 협정 이후에는 벨기에와 룩셈부르크를 거쳐 라인 강으로의 행군에 미국 육군 중앙의 작전 보좌관으로 참여했고, 라인란트 점령 기간 동안 참모부에서 복무했다.[3]

벨로 우드에서의 복무로 프랑스 정부로부터 십자 훈장을 받았으며, 존 J. 퍼싱 장군으로부터 공로 표창을 받아 1932년에 퍼플 하트 훈장을 받았다.[3]

2. 3. 전간기

스미스는 1919년 4월 미국으로 돌아와 4년 동안 버지니아주 노퍽에서 근무했고, 로드아일랜드주 뉴포트에 있는 해군대학에서 공부했으며, 워싱턴 D.C.의 해군 작전국 전쟁 계획 부서에서 근무하며 합동 육군-해군 계획 위원회에서 근무한 최초의 해병대 장교가 되었다.[4] 1923년 5월 워싱턴을 떠나 9월까지 전함 와이오밍(BB-32)과 아칸소(BB-33)에서 미 해군 정찰 함대 해병 장교로 복무했다.[4]

1924년 2월, 해병대 본부 근무 및 서인도 제도 복무 후 아이티 원정 임무를 수행하는 해병 여단에 합류하여 참모장 겸 작전 및 훈련 담당 장교로 근무했다.[4] 1925년 8월 귀국하여 버지니아주 콴티코에 있는 제1해병여단의 참모장으로 복무했다.[4] 1926년 9월부터 1927년 6월까지 콴티코 해병대 학교에서 학생으로, 1927년 7월부터 1931년 3월까지는 필라델피아 해군 기지 해병 막사에서 병참 장교로 근무했다.[4]

1931년 4월, 스미스는 캘리포니아함(BB-44)에서 미 해군 전투 함대 사령관 보좌관 겸 해병 장교로 근무했다.[4] 1933년 6월부터 1935년 1월까지 워싱턴 해군 기지 해병 막사를 지휘했고, 이후 2년 동안 캘리포니아주 샌프란시스코에서 태평양 사령부 참모장으로 근무했다.[4] 1937년 3월, 해병대 본부로 소환되어 작전 및 훈련 부서 국장으로 2년 동안 근무했다.[4]

스미스는 1939년 4월부터 9월까지 토마스 홀콤 소장 아래에서 해병대 부사령관으로 근무했으며, 이 기간 동안 준장으로 진급했다.[4]

2. 4. 제2차 세계 대전

스미스 장군은 1940년 10월 콴티코에서 제1해병여단을 지휘하여 쿠바 관타나모만에서 장기간 상륙 훈련을 실시했다.[4] 1941년 2월 여단이 제1해병사단으로 재편성되면서 초대 사령관이 되었고,[4] 1941년 6월에는 대서양 함대 상륙 부대를 지휘하며 제1 및 제9 육군사단과 함께 상륙전 훈련을 받았다. 1939년에는 준장으로 진급하여 제1해병 여단장이 되었고, 1941년 2월에는 제1해병 사단의 초대 사단장이 되었고, 6월에는 대서양 함대 소속의 제1군 사령관이 되었다. 지휘하에는 제1해병 사단과 육군 제1·제3 보병 사단이 존재했다. 제2차 세계 대전 전야에 스미스는 해군·육군 그리고 해병대 부대에 수륙 양용전 훈련을 실시했다. 이는 태평양·대서양의 전투에서 미군의 상륙 작전 성공에 큰 요인이 되었다.

1944년 괌의 "사령관 텐트"에 있는 스미스


태평양 전쟁이 발발하자 1942년 5월에 알렉산더 반데그리프트 소장 지휘의 제1해병 사단이 스미스의 지휘에서 벗어나 태평양 방면의 격전지 과달카날섬에 투입되었다. 1942년 8월, 태평양 함대 상륙군단을 지휘하며 제2, 제3해병사단, 제7 육군사단 등의 훈련을 담당했다. 태평양 함대 상륙군단은 이후 제5상륙군단으로 재지정되었고, 1943년 9월 스미스는 길버트 제도 전역 계획을 위해 진주만에 도착했다. 1944년 2월 중장으로 진급했으며,[4] 사이판 전투에서 육군 제27 보병사단장 랠프 C. 스미스/Ralph C. Smith영어 소장을 해임하는 "스미스 대 스미스 사건"을 일으켰다.

이후 이오지마 전투에서 제56 임무 부대 사령관으로서 제3, 제4, 제5해병사단으로 구성된 제5 양용전 군단을 지휘했다. 이오지마 전투는 태평양 전쟁 중 미군 사상자가 일본군을 웃돈 드문 사례로, 3만 명에 가까운 사상자가 발생하여 책임을 지고 사실상 해임되었다. 1945년 오키나와 상륙 계획 당시 레이몬드 스프루언스와 리치먼드 터너는 스미스가 지휘하기를 원했으나, '스미스 대 스미스 사건'으로 체스터 니미츠를 비롯한 상층부의 반대로 무산되었다. 결국 육군 사이먼 B. 버크너 주니어 중장이 오키나와 전투 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5] 1945년 9월 2일 전함 미주리에서의 일본 항복 조인식에서 스미스 참석 제안이 있었으나 니미츠는 거부했다. 1945년 7월 미국으로 돌아와 캠프 펜들턴에서 해병 훈련 및 대체 사령부를 지휘했다.

2. 5. 퇴역 이후

스미스는 1946년 5월 15일 해병대에서 퇴역했으며, 전투에서 특별히 칭찬을 받아 퇴역 명단에서 대장으로 진급했다. 64세의 그는 캘리포니아주 라호야에 거주하며 취미인 정원 가꾸기를 했다. 1948년에는 자서전을 집필하여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스미스의 아내 에이다 B. 윌킨슨은 1962년에 사망했다. 오랜 투병 생활 끝에 스미스는 1967년 1월 12일 캘리포니아주 샌디에이고의 미 해군 병원에서 84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장례식은 1월 14일 해병대 신병 훈련소 예배당에서 거행되었다. 그는 샌디에고 항구와 노스 아일랜드 해군 항공 기지를 내려다보는 포트 로즈크란스 국립묘지에 완전한 군사적 예우를 갖춰 안장되었다. 스미스는 아들 준장 존 V. 스미스를 유족으로 남겼다.

3. 성격 및 평가

홀랜드 스미스는 거친 성격으로 금방 고함을 질러 '''"하울린 매드"'''(Howlin' Mad, "고함치는 광인"의 뜻) 또는 '''"매드 스미스"'''(Mad Smith, "광인 스미스")라는 별명으로 불렸다. 상륙 작전을 둘러싸고 수륙 양용 부대를 지휘했는데, 스미스와 마찬가지로 "테러블 터너"(「공포의 터너」)라는 별명으로 불린 리치먼드 K. 터너 해군 중장과는 권한 범위를 두고 자주 고함이 오갔다.

육군과의 관계도 험악하여, "스미스 대 스미스 사건" 당시 태평양 방면 육군 사령관 중장으로부터 "너희들은 물가에서 달리는 집단에 불과하다. 육상에서의 전투를 아는가. 너희 지휘관은 육군 장군처럼 대부대를 지휘하는 훈련을 받지 않았고, 그 능력도 없다"라고 맹렬히 비난을 받았다.

한편 해병대 내부에서는 해병대 자체가 더글러스 맥아더 육군 대장 등에게 "해병대는 번지에서 원주민과 싸우는 정도 밖에 능력이 없는 특수한 무력 소집단"이라고 무시당하고 있었기 때문에, 스미스에 대해서는 호의적인 평가도 있었다. 특히 해병대 사령관이었던 중장은 스미스가 어떤 고위 관료를 상대하더라도 해병대의 생각을 관철해 줄 것이라고 기대했다.

해군에서도 레이먼드 A. 스프루언스는 그를 높이 평가하여, 길버트 마셜 제도 전투에는 스미스 같은 남자가 필요하다며, 당시 스미스의 상관이었던 남태평양 방면군 사령관 윌리엄 F. 할제이 대장에게 부탁하여 전속을 시켜 줄 정도였다. 후에 오키나와 전투에서 일본군의 가미카제에 의해 해군의 피해가 늘어나자 스프루언스는 "육군 항공대 녀석들은 공포에 질려, 고고도에서 제대로 맞지도 않는 폭탄을 떨어뜨리기만 할 뿐 쓸모가 없다. 홀랜드 스미스 같은 용맹한 남자가 지휘관이었다면 이렇게 고생하지는 않았을 것이다"라고 푸념했다. 인간적으로는 호불호가 갈렸지만, 그 용맹함은 보증되어, 디스팅귀시드 서비스 메달, 퍼플 하트장을 수여받았으며, 많은 훈장을 받았다.

4. 군사적 업적

4. 1. 상륙작전 교리 발전

4. 2. 주요 전투 지휘

5. 훈장

홀랜드 스미스는 다음과 같은 군사 훈장과 포상을 받았다.

훈장내용
해군 공로 훈장 4회
퍼플 하트 훈장
해병대 원정 훈장 (3개의 종군 성장 부착)
멕시코 종군 훈장
도미니카 종군 훈장
제1차 세계 대전 승전 기념 훈장 (5개의 클래스프 부착)
독일 점령군 기념장
미국 방위 종군 기념장 ("BASE" 클래스프 포함)
미국 종군 기념장
아시아-태평양 종군 훈장 (5개의 종군 성장 부착)
제2차 세계 대전 승전 기념 훈장
바스 훈장 기사단장
도미니카 공로 훈장
프랑스 무공 십자 훈장
무공 십자 훈장 (종려나무 잎 부착)


6. 기타

6. 1. 한국과의 인연

6. 2. 명명

하와이 오아후에 있는 캠프 H. M. 스미스는 그의 이름을 딴 해병대 기지이다. 이곳에는 태평양 사령부, 태평양 해병대 및 기타 사령부가 있다.

해병대 연맹에는 스미스 장군의 이름을 딴 두 분견대가 있다. 하나는 인디애나 주 호바트에 있는 Howlin Mad 분견대 #93이고, 다른 하나는 앨라배마 주 버밍햄에 있는 Howlin' Mad Smith 분견대 #592이다.

영화 ''아버지의 깃발''에서 스미스 장군은 배우 고든 클랩이 연기했다. 1964년, 스미스는 업적 아카데미의 골든 플레이트 상을 받았다.[6]

6. 3. 대중 매체

영화 ''아버지의 깃발''에서 스미스 장군은 배우 고든 클랩이 연기했다.[6]

참조

[1] 서적 Marines: An Illustrated History : The U.S. Marine Corps from 1775 to the 21st Century Zenith Imprint 2007-11-15
[2] 서적 Coral and Brass http://www.ibiblio.n[...] United States Marine Corps
[3] 서적 From Whaleboats to Amphibious Warfare: Lt. Gen. "Howling Mad" Smith and the U.S. Marine Corps Greenwood Publishing Group 2003-02-28
[4] 웹사이트 Smith, Holland M https://www.history.[...] 2022-12-08
[5] 서적 Retribution: The Battle for Japan, 1944–45 https://archive.org/[...] Knopf Publishing Group
[6] 웹사이트 Golden Plate Awardees of the American Academy of Achievement https://achievement.[...] American Academy of Achievem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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